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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욱주 오피니언 칼럼] 진정한 ‘기독교 독립운동가’ 이승만의 투쟁과 90만 돌파 <건국전쟁> - 신사참배 강요, 정치 모략 일환 한국 기독교계 전체 붕괴 위기 - 日, 기독교인 반정부 세력 인식 이승만, 신앙부흥 운동 주도해 - 신사참배 무관한 교역자들 양성 해방 후 교회 부흥 가장 큰 기여
  • 기사등록 2024-02-26 10: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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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건국전쟁>의 김덕영 감독.  


이번 박욱주 박사님의 칼럼은 90만 명을 돌파한 영화 <건국전쟁>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편집자 주


◈일제와 기독교: 기독교를 멸시하고 증오했던 일제 정권수뇌부

이승만 전 대통령의 업적을 중심으로 1940-1960년대 한국 현대사를 조명한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 흥행에는 기독교인 관객들의 호응도 한몫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러 중대형 교회에서 단체관람을 했고, 개인적으로 관람한 기독교인 관객들 수도 상당한 것으로 추산된다.


사실 영화 <건국전쟁>에 이승만 대통령의 신앙이나 당시 기독교계의 상황 등에 대한 내용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신교계에서 이 작품에 환호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이승만 대통령이 한국 기독교계의 생존과 부흥의 기반을 마련한 인물이라는 점, 그리고 둘째는 우리 기독교계 전반이 보수 및 반공 정치 이념을 적극적으로 지지한다는 점이다.


한국 기독교계는 일제강점기 후반 암흑기를 거쳐야 했다. 무엇보다 일제의 무모한 진주만 폭격과 태평양 전쟁 발발은 한국 기독교계 전반에 어두운 그늘을 드리웠다. 한국 기독교는 언더우드·아펜젤러 등을 필두로 여러 미국 선교사들의 헌신 덕분에 기반을 마련했다. 이 선교사들은 미국 교계의 지원을 이끌어내, 한국 근대화와 인재 양성을 주도했다.


일제 수뇌부 입장에서 한국 기독교인들은 대단히 껄끄럽게 여겨지는 존재였다. 당시 일본 정권 수뇌부는 크게 세 집단으로 나뉘어 있었다. 일왕을 중심으로 조정을 구성한 공경 출신 세력, 육군을 장악한 조슈 번벌 세력, 그리고 해군을 장악한 사쓰마 번벌 세력, 이들 세 세력은 치열한 정치적 암투를 벌이면서 정국 주도권 다툼을 벌였다.


하지만 이들 모두 동의하며 협력하는 사안이 몇 가지 있었는데, 가장 대표적으로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제국주의 패권 장악, 서태평양 해양패권 장악, 그리고 서구 문화와 종교(특히 기독교)에 대한 예속 극복이었다. 일본에서 기독교(일본에 처음 전해진 기독교는 천주교였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때부터 메이지 시대인 1873년 기독교 금교령 해제 전까지, 약 320년 동안 극심한 박해를 받았다.


사일런스

   ▲도쿠가와 막부 시절 천주교인 박해 양상을 다룬 영화 <사일런스>.


근대화와 함께 금교령이 해제되기는 했어도 워낙 오랜 기간 동안 박해를 받아온 터라, 기독교인들에 대한 일본인들의 인식은 기본적으로 좋지 않았다. 기독교인이라고 하면 정권에 반발하는 반골, 그리고 서구 열강의 앞잡이라는 인식이 뿌리 깊게 퍼져 있었다.


게다가 일본이 빠르게 근대화에 성공하면서 서구 열강을 의존의 대상이 아닌 경쟁 상대로 보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서구 선교사들이 전파하는 기독교(천주교와 개신교 모두)에 대한 의구심과 반감이 일본 사회 내에 그대로 유지되었다.


조선 역시 1801년 신유박해를 기점으로 천주교인들을 극렬하게 박해했지만, 조정이 근대화에 성공하지 못해 서구 열강에 크게 의존하는 비참한 처지로 전락했다. 덕분에 1880년대 미국 개신교 선교사들이 선교를 위해 활동할 수 있는 여지가 크게 확장되었다.


하지만 대한제국이 국권을 잃고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우리 기독교계는 커다란 위기를 맞이한다. 그리고 이 위기는 미국을 중심에 둔 서구 연합군과의 전면전이 펼쳐진 태평양 전쟁 시기 가장 심각한 국면을 맞이한다.


◈이승만과 기독교: 신사참배 강요로 무너진 교회를 보살핀 독립운동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는 본질상 종교분쟁이 아니라 정치 모략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일본에서 기독교인들이란 서구 열강의 앞잡이이자 반정부 세력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따라서 이들이 일제에 충성한다는 증거로 그들이 가장 큰 죄악으로 여기는 우상숭배를 강요했다.


이것은 결정적 순간에 신앙을 버리고 일왕과 일제의 정권 수뇌부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정치적 메시지가 담긴 모략으로, 사실상 후미에(일본에서 기독교인들 색출하고 배교시킬 때 사용했던, 예수나 마리아가 새겨진 목판 혹은 금속판)를 한반도 식민지에 맞게 변형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기독교인들에 대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는 이미 1920년대부터 조금씩 시작됐고, 1930년대 후반 본격적으로 실시됐으며, 1941년 태평양 전쟁으로 그 압박이 극한에 이르렀다. 이 만행으로 한국 기독교계는 거의 궤멸될 위기에 처했다. 소수의 귀중한 목회자와 신자들이 도피·투옥·고문·순교를 불사하고 저항했지만, 다수 교회들과 교인들은 일제의 압박에 굴복해 우상숭배에 참여했다.


신사 신사참배 동방요배 일본 일제 일제강점기 신앙 평양 신궁

     ▲일제시대 한국 장로교회 총본산 평양에 지어졌던 신사, 평양신궁. ⓒ위키


신사참배 강요의 참상은 신앙의 옥석을 가리는 귀한 계기가 되었지만, 한국 기독교계 전체로 봐서는 붕괴 위기를 초래했다. 박해 당시에도 문제가 컸지만, 해방 이후에도 두고두고 한국교회의 신앙을 잠식하고 뒤흔드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신사참배에 적극 동참했던 친일 이력 교역자들이 여전히 교단 내부에서 위세를 부리고 있었다. 교회의 전면적 갱신이 필요하던 시기였다.


해방 직후 한국교회 신앙 갱신과 부흥의 전기를 마련한 인물이 이승만 대통령이었다. 그는 기존 한국교회의 문제를 익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신사참배와 천황 숭배를 독려하고 친일행각에 참여했던 기존 기독교 교역자들을 적극적으로 지탄하거나 축출하지는 않았지만, 새로 건국된 대한민국에서 다시 시작될 기독교 부흥의 주도권을 그들에게 넘겨주지 않았다.


그는 해방 후 신앙부흥 운동 주도권을 아예 대통령인 자신이 붙들고 있었다. 그는 미국 선교사와 교계 인사들의 지원을 이끌어내고 신사참배와 무관한 새로운 세대의 국내 교역자 양성을 독려하면서, 일제의 정치모략에 물든 한국 기독교를 다시 미국식으로 ‘청교도화’하는데 힘썼다.


이로써 일제의 우상숭배 모략에 의해 혼탁해진 한국교회의 신앙 상태를 완벽하게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일신하는 데 성공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이승만 대통령의 공로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영화 <건국전쟁>이 기독교와 관련된 내용을 거의 기술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 환호하는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적 업적을 비교적 정당하게 재평가하는 일 자체도 반갑지만, 이것을 통해 그가 한국교회에 기여한 공로를 간접적으로 되새겨볼 수 있기 때문인 이유가 더 큰 것이다.


따라서 보수 반공 이념과 기독교 신앙을 과도하게 동일시하는 행태만 주의한다면, 교회와 기독교인들의 <건국전쟁>에 대한 호응은 십분 이해되는 일인 동시에 바람직한 일로도 여겨진다.


일제가 한국교회에 강요한 영적 타락의 역사를 되새겨보면서 신앙의 순전함을 지키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새삼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간접적으로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승만 하와이 한인기독교회

   ▲이승만 대통령이 건립한 하와이 한인기독교회. ⓒ이승만기념관


그래서 우리 한국 기독교인들 입장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누구보다 일제로부터의 해방에 크게 공헌한 독립운동가이다. 김구·이시영·이회영·김원봉 등도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전개했지만, 이들은 한국교회의 영적 갱신에는 기여한 바가 없다.


안창호 선생을 비롯한 다른 기독교인 독립운동가들의 활동 역시 귀하지만, 적어도 해방 이후 한국교회의 부흥과 영적 갱신에 있어 이승만 대통령만큼 크게 기여한 인물은 찾아볼 수 없다. 그는 정치와 신앙 양면에서 다른 어떤 독립운동가들보다 일본 제국주의 전범들이 질색할 만한 일을 앞장서 주도하고 성공시킨 인물이다.


이런 이유로 대다수의 한국 기독교인들은 이승만 대통령의 여러 개인적 허물과 정치적 과오에도 불구하고, 그가 한국의 독립과 자유민주주의 확립을 위해 온 인생을 바쳐 투쟁한 데 대해 깊은 감사를 느낀다. 영화 <건국전쟁>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호응은 바로 이런 감사의 심정에서 나오는 것이다. <계속>


박욱주 박사

연세대 한국기독교문화연구소 연구교수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객원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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